서류 뭉치를 뒤지다가 밤을 샜던 날

서류 뭉치를 뒤지다가 밤을 샜던 날

노트북 화면에 적힌 폰트 크기만 열 번을 바꿨다

사업계획서를 쓰기 시작한 게 아마 지난달 초였을 거다. 처음엔 막연하게 ‘좋은 아이템이니까 정부 지원금 정도는 금방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1억 원 정도의 예비창업패키지 자금을 따내면 내 사업이 탄력을 받을 것 같다는 그 순진한 믿음이 문제였다. 막상 공고문을 열어보니 요구하는 서류가 한두 장이 아니더라. 사업자등록증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상세한 시장 조사 자료를 만들어야 하나 싶었다. 특히나 가독성을 위해 폰트 크기를 10포인트로 할지, 11포인트로 할지 고민하며 밤을 새우던 순간엔 내가 사업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문서 디자인을 하려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문단 간격을 160%로 맞추라는 공고문의 세세한 지침은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3일 동안 카페에서만 5만 원 정도를 썼는데, 정작 내 손에 쥐어진 건 수정에 수정을 거친 PDF 파일 하나뿐이었다.

곤지암 근처였나, 상담 한 번 받으러 갔던 날의 기억

중간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예비창업자 상담을 예약했다. 꽤 멀리까지 갔어야 했는데, 가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그때 상담해 주시는 분이 ‘대표님, 이 기획서가 너무 기술 중심으로만 써져 있어요. 시장 반응을 어떻게 끌어낼지 조금 더 고민해 보세요’라고 하셨다. 그땐 그 말이 참 야속하게 들렸다. 내 기술이 제일 중요한데, 이걸 왜 굳이 다른 쪽으로 포장해야 하나 싶어서 말이다. 상담을 받고 나오면서 역 근처에서 김밥 한 줄을 사 먹었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왜 그렇게 추웠는지 모른다. 상담 비용은 없었지만, 오가는 시간과 들이는 에너지를 생각하면 이미 꽤 큰 비용을 치른 셈이었다. 그때 알았다. 정부 지원금이라는 게 그냥 주는 돈이 아니라, 내 사업을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라는 걸 말이다.

채용사이트를 들락거리는 내 모습이 낯설다

서류 제출 마감 기한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이 밀려왔다. 혹시라도 서류가 누락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매일 아침 채용사이트를 확인하듯 사업 지원 공고 사이트만 새로고침 했다. 다른 팀들은 어떻게 사업계획서를 쓰는지 궁금해서 관련 커뮤니티도 찾아봤는데, 어떤 사람은 3번 만에 붙었다고 하고 누구는 첫 시도에 됐다고 했다. 이게 운인지 실력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냥 내 돈 조금 모아서 작은 가게라도 여는 게 속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부 지원금은 받으면 좋지만,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때로는 내 사업의 본질을 흐리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사업계획서에 적힌 화려한 매출 목표를 보면서, 나는 정말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게차라도 빌려야 할 상황이 올까

주변에서는 나보고 벌써 사업 다 한 사람처럼 굴지 말라고 한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한 예비 창업자일 뿐인데, 서류상으로는 이미 거창한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심지어 나중에는 지게차를 빌려야 할 상황이나 창고 임대료까지 계산하고 있더라. 아직 사무실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정부 지원사업이라는 게 당근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넘어야 할 높은 벽처럼 느껴진다. 만약 이번에 떨어진다면 나는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폰트 크기를 조절하며 밤을 지새우게 될까. 정답이 없다는 게 제일 답답한 부분이다.

어쩌면 서류 작업 자체가 사업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어젯밤에도 제출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 다시 한번 내용을 읽어봤다. 사업자등록을 하기 전까지의 이 기간이 정말 길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이 긴 서류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획서가 아니라,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스스로 명확히 해야 하니까. 지원금이 나오면 지게차를 사든, 서버를 구축하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내 사업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떨어지면 좀 허무하겠지만, 그래도 내 생각들이 문서로 정리된 것만으로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떨어지면 당분간은 이 파일들 쳐다보기도 싫겠지만 말이다.

댓글 2
  • 서류 준비하느라 밤새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이 답답하네요. 저도 사업 아이템 구상할 때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 밤에 김밥 먹으면서 상담 내용이 생각났네요. 시장 반응 고민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그때 와닿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