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금을 받아서 ERP를 바꾸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지원금을 받아서 ERP를 바꾸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회사 규모에 맞지 않는 엑셀 정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순간

우리 회사는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제조업체다. 직원은 고작 20명 안팎인데, 거래처에서 주문받는 품목은 수백 가지가 넘다 보니 매번 자재 입출고와 재고 수량 맞추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존에는 그냥 공유 폴더에 엑셀 파일을 하나 올려두고 생산팀, 자재팀, 영업팀이 번갈아 가며 수정하는 식으로 버텼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이전 버전 파일에 덮어쓰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날 오후 내내 다 같이 일손을 놓고 데이터 복구에 매달려야 했다. 지난번에는 납품 기일을 맞추지 못해 거래처에서 항의 전화를 받고 난 뒤로 사장님이 드디어 결단을 내리셨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시스템이라는 걸 제대로 들여놓자고 하셨는데, 마침 정부에서 비용의 일부를 대주는 스마트서비스지원사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엑셀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내가 실무 담당자가 되어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SMTECH 사이트 로그인부터 막히던 지원사업 신청 과정

정부지원금을 받기 위한 첫걸음은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포털인 SMTECH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기업 정보를 등록하는 것부터였다. 그런데 시작부터 범용 공동인증서가 없어서 이를 신규 발급받는 데만 이틀이 걸렸고, 사이트 자체의 보안 프로그램 설치 오류 때문에 로그인을 시도하다가 컴퓨터를 몇 번이나 강제 부팅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요구하는 제출 서류 목록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최근 3개년 재무제표부터 시작해 국세 및 지방세 완납증명서, 법인등기부등본, 특허증 사본까지 챙겨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다. 가장 머리가 아팠던 부분은 사업계획서 작성이었는데, 스마트기술 도입을 통해 어떤 식으로 공급망을 관리하고 어떤 효과를 낼 것인지를 정량적인 수치와 도표로 표현해야 했다. 아직 쓰지도 않은 시스템이 가져올 매출 증대 효과나 리드타임 단축 시간을 억지로 쪼개어 소수점 단위까지 채워 넣으면서, 내가 지금 행정 서류를 메우기 위해 일하는 건지 진짜 현장 개선을 위해 일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준비 기간 삼 주 동안은 퇴근 후에도 집에서 서류 양식을 붙잡고 씨름하느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월 몇만 원짜리 조립식 ERP와 SAP B1 사이에서의 갈등

처음에는 월 수십만 원 내외로 저렴하게 임대해서 쓸 수 있는 이카운트 같은 클라우드형 국산 ERP를 알아봤다. 구축 비용도 거의 들지 않고 가볍게 쓰기 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서비스지원사업 매칭을 돕는 외주 컨설팅 업체와 상담을 진행하면서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 회사의 다품종 소량 생산 구조와 원부자재 수입 경로를 보더니, 장기적인 데이터 통합과 정교한 공급망관리를 위해서는 SAP Business One(SAP B1)을 도입하는 것이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 권유했다. 솔직히 이름 있는 글로벌 솔루션을 쓰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총 프로젝트 비용이 약 1억 원 정도로 책정되었는데, 정부지원금으로 최대 6,000만 원까지 보전을 받더라도 회사가 실제로 내야 하는 부담금이 약 4,000만 원에 달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액수였기에 사장님도 결재판을 앞에 두고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하셨다. 결국 이번 기회에 인프라를 제대로 닦아놓자는 결론에 이르러 계약서에 최종 서명하게 되었다.

전표처리와 공급망 관리 기능이 실무에 들어왔을 때의 괴리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선정이 되고 개발 업체 엔지니어들이 회사에 들어와 본격적인 ERP 구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제안한 표준 프로세스와 우리 실무진이 일하던 현장 방식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예컨대 예전에는 대충 수기로 적어 넘기거나 월말에 일괄적으로 처리하던 전표처리가 SAP B1 시스템 안에서는 정해진 전표 규칙과 결재 라인을 거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경리 직원은 “단순한 영수증 하나 처리하는 데 메뉴를 몇 번씩 클릭해야 해서 일거리가 세 배는 늘었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자재 창고에서도 혼란이 이어졌다. 실시간 재고 파악과 공급망 관리를 위해 입고 시점에 바코드를 찍어 즉시 전산에 반영하라고 교육했지만, 바쁜 현장 작업자들은 납품 차량이 몰리는 시간에 일단 물건부터 내려놓고 나중에 몰아서 입력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전산 데이터와 실제 창고 재고가 맞지 않는 현상이 반복되었고, 직원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옛날 엑셀로 일할 때가 속 편했다”는 소리까지 공공연하게 들려왔다.

최종 현장 점검을 끝내고 남은 유지보수 비용과 애매한 활용도

장장 6개월에 걸친 시스템 구축과 테스트가 끝나고, 정부에서 보낸 감리단이 회사에 직접 방문해 현장 점검을 진행했다. 우리가 개발을 완료했다는 결과 보고서와 실제 돌아가는 화면을 대조해 보았는데,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프로젝트가 단 2시간 남짓한 서류 검토와 몇 번의 클릭 테스트 끝에 합격 점수를 받으며 종료되었다. 행정적인 절차는 끝났지만, 이제 진짜 문제는 우리 내부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당장 다음 달부터는 매달 정기적으로 빠져나가는 SAP B1 라이선스 비용과 유지보수료 고지서가 날아올 예정이다. 시스템은 구축해 놓았으나 모든 기능이 완벽하게 우리 몸에 맞는 것은 아니어서, 일부 부서에서는 여전히 구석에서 조용히 엑셀을 켜고 자신들만의 이중 장부를 적고 있다. 억 단위의 예산과 반년 넘는 시간을 투입해서 그럴싸한 전산망을 갖추기는 했지만, 이 거대한 도구를 우리가 100% 활용할 날이 언제 올지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댓글 2
  • 수기로 처리하던 전표가 시스템에 들어가니 경리 팀에서 정말 힘들어하는 모습이 딱 들어맞네요. 특히 메뉴를 너무 많이 클릭해야 한다는 점이 답답했을 것 같아요.

  • 저는 ERP 도입 초기에 SAP B1의 가격 때문에 정말 고민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데이터 통합의 중요성은 알았지만, 회사의 규모에 맞는 솔루션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